공익법인인 방송문화진흥회가 주식의 70%를, 정수장학회가 30%를 보유한 주식회사이다. 공적 소유 구조 때문에 한국의 공영 방송으로 분류되지만, 공영방송 가운데 공익적 정체성이 가장 약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같은 성격은 MBC의 법적 지위와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의 배경이 되어 왔다. 사장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가 내정하고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는데, 정치적 갈등 속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사장이 많았다.
1962년 창업주 김지태의 지분이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로 넘어갔고, 1980년 언론통폐합을 거쳐 1981년 정부가 헌납받은 주식 70%를 한국방송공사에 현물 출자하면서 공영 체제에 편입되었다. 1988년 12월 방송문화진흥회법 제정에 따라 방송문화진흥회가 설립되어 한국방송공사의 지분을 넘겨받아 대주주가 되었다. 2008년 이후 정부와의 갈등 속에서 2012년 170일, 2017년 72일 동안 노동조합 파업을 겪었다. 2025년 개정 방송문화진흥회법에 따라, 2026년에는 시민 150명으로 구성된 사장후보 국민추천위원회를 거쳐 사장이 선임되었다.
MBC는 보도 프로그램 《뉴스데스크》, 시사 프로그램 《PD수첩》과 함께 1990년대 이후 '드라마 왕국'으로 불린 드라마, '국민 예능'으로 불린 《무한도전》 등의 예능 프로그램으로 알려졌다. 《사랑이 뭐길래》는 중국 한류의 계기로 꼽히고, 《대장금》은 91개국에 수출되었으며, 2010년대 이후에는 《복면가왕》 등 예능 프로그램의 포맷 수출이 늘었다. 2010년대 중반에는 장기 파업 속에 시사 프로그램의 위상이 낮아지고 드라마도 침체했으나, 2017년 이후 뉴스 신뢰도가 회복되어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조사에서 2023년 가장 신뢰받는 뉴스 브랜드로 꼽혔다.
MBC의 보도는 집권 세력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정치적 편향 비판을 받아 왔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보수 정부 시기에는 노동조합과 언론 단체가 경영진의 정권 편향을 비판했고, 2017년 이후에는 보수 정당과 일부 언론학자가 친민주당 편향을 비판하였다. 윤석열 정부 시기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의 법정 제재가 MBC에 집중되었으나, 이후 제재 취소 소송에서 규제 기관이 잇따라 패소하였다.
역사
설립과 라디오 시대 (1959년~1968년)
MBC 계열의 출발점은 1959년 4월 15일 부산에서 개국한 부산문화방송(호출부호 HLKU, 현 부산문화방송)이다. 사업가 김상용(金相用)과 방송 기술인 정환옥(鄭煥玉)이 설립을 추진해 1958년 7월 14일 정부로부터 상업 방송 허가를 받았고, 이듬해 주파수 1035kHz, 출력 1kW로 개국하였다. 1954년 12월 종교 방송으로 문을 연 기독교방송과 달리 부산문화방송은 국내 최초의 민간 상업 라디오 방송이었다. 개국 뒤 자본 부족과 광고 수입 부진으로 경영난을 겪자 김상용과 정환옥은 부산일보 사주 김지태에게 인수를 제안했고, 김지태는 1959년 9월 23일 부산문화방송의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정환옥은 김지태의 지원을 받아 서울에 새 상업 방송국을 세우는 일을 맡았다. 1959년 체신부가 민간 방송 허가 4건을 내준 뒤 추가 허가가 어려워지자, 정환옥은 허가를 받은 화가 고희동(高羲東)과 교섭해 허가권을 넘겨받았다. 1961년 1월 16일 서울 인사동 15번지의 동일가구점 4층을 사무실 겸 연주소로 계약하였고, 1월 28일 체신부로부터 서울민간방송주식회사 설립 허가를 받았다. 김지태는 2월 21일 자본금 2억 환으로 서울민간방송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 취체역 사장에 올랐으며, 회장은 고희동이 맡았다.
회사 이름과 주파수는 개국 전까지 여러 번 바뀌었다. 3월 8일 상호를 한국방송주식회사로 바꾸면서 주파수를 1380kHz에서 1004kHz로 옮겼고, 10월 20일 상호를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로 확정하였다. 이때 주파수는 900kHz로, 호출명칭은 'HLKV 라디오서울'에서 'HLKV 문화방송'으로 바뀌었다. 미국 콜린스사에 주문한 송신기의 도입이 늦어져 개국일은 9월 30일에서 11월 25일로, 다시 12월 2일로 미뤄졌다. 한국문화방송은 1961년 12월 2일 오전 6시 호출부호 HLKV, 주파수 900kHz, 출력 10kW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방송은 인사동의 임대 사옥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사옥은 1969년 정동 신사옥으로 옮길 때까지 8년간 쓰였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승인을 받아 1962년 3월 27일 김지태 회사의 임원 8명을 구속했고, 이어 김지태의 아내와 김지태 본인도 구속하였다. 김지태가 구속된 것은 1962년 4월이었으며, 관세법 위반과 부정축재 등 9개 혐의가 적용되었다. 군법회의는 5월 24일 징역 7년을 구형했고, 김지태는 이튿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법률고문이 요구한 재산 포기각서에 날인하였다. 이어 6월 20일 재산 양도 서류에 날인한 지 이틀 뒤 석방되었다. 포기각서에 포함된 주식은 문화방송 주식 2만 주와 부산문화방송 주식 1만 3,100주였다. 이로써 부산일보·부산문화방송·한국문화방송과 김지태가 1958년 세운 부일장학회의 재산이 새로 만들어진 5·16장학회로 넘어갔다. 5·16장학회는 1962년 7월 7일 설립되어 7월 14일 법인 등기를 마쳤다. 문화방송은 7월 18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5·16장학회로의 주권 양도를 추인했고, 7월 22일 고원증(高元增)을 2대 사장으로 선임하였다. 주식의 양수 절차는 9월 4일 모두 끝났다. 5·16장학회는 1982년 1월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2025년 말 기준으로도 문화방송 주식의 30%를 보유하고 있다.
이 주식 이전은 뒤에 국가 기관의 조사 대상이 되었다. 2005년 7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시켜 김지태를 구속한 뒤 처벌을 면해 주는 조건으로 언론 3사의 주식 등을 헌납받았다고 결론지었다. 2007년 5월 29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도 부일장학회 헌납이 "공권력에 의해 강요된 행위로서 의사결정권 및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결정하고, 언론 3사에 대해서는 언론의 공공성과 중립성 등 언론의 자유를 중대하게 침해한 것이라고 보았다. 위원회는 국가가 김지태와 부일장학회에 사과하고, 헌납 주식은 원상회복을 원칙으로 하되 정수장학회가 반환하지 않으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를 배상하라고 권고하였다. 반면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운동 중에 정수장학회가 새로 설립된 공익 재단이라고 주장하고, 김지태가 "처벌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 헌납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강압이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다는 발언은 뒤에 정정하였다. 정수장학회 측은 유족과의 소송에서 김지태가 헌납 이후 정부로부터 해외 차관과 은행 차입 등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김지태의 유족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 이후인 2010년 6월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주식 양도 등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2012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의 위협과, 기부 승낙서 날인 뒤 군 검찰이 공소를 취소한 정황 등을 근거로 증여가 강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강박의 정도가 의사 결정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을 정도는 아니어서 증여가 무효는 아니고 취소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또 1962년 6월 20일 증여 시점부터 10년의 제척기간이 지나 취소권이 소멸했다며 청구를 기각하였다. 2013년 10월 서울고등법원도 같은 이유로 항소를 기각하였고, 국가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권도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하였다. 2014년 2월 대법원은 심리불속행으로 상고를 기각하였다.
한국문화방송은 1963년 4월 12일 정부로부터 지방 라디오국 4곳의 설치 허가를 받아 제1차 지방망 확장 사업에 들어갔다. 첫 직할국인 대구(HLCT)가 1963년 8월 개국했고, 이어 광주(HLCN)가 1964년 6월 13일, 대전(HLCQ)이 1964년 9월 26일, 전주(HLCX)가 1965년 2월 20일 개국하였다. 이로써 서울과 부산을 포함한 6대 도시에 방송망을 갖추었다. 1966년 1월에는 서울 방송의 송신 출력을 10kW에서 50kW로 높였고, 1968년에는 직할 지방국 4곳의 출력도 높였다. 같은 해부터 1971년까지는 제2차 전국 방송망 확장 사업으로 지역 민영 방송사 13곳과 제휴를 맺어, 텔레비전 7개사와 라디오 20개사로 이루어진 21개 지방사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텔레비전 개국과 상업 방송 경쟁 (1969년~1979년)
문화방송은 1966년 5월 11일 텔레비전 방송국 개설 허가를 신청해 6월 11일 가허가를 받았고, 1967년 9월 20일 서울 정동 22번지에 새 사옥을 착공했다. 텔레비전 설비는 1967년 영국 파이(Pye)사와 미국 암펙스사에서 들여온 500만 달러의 차관으로 마련하였다. 1969년 8월 8일 정동 사옥에서 호출부호 HLAC, 채널 11, 영상 출력 2kW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 HLKZ-TV, KBS TV, TBC TV에 이은 국내 네 번째 텔레비전 방송국이자 두 번째 민간 상업 텔레비전이다. 이로써 국영 KBS와 상업 방송 TBC·MBC가 경쟁하는 3사 체제가 본격화하였다. MBC 텔레비전은 광고를 하지 않는 교육 방송으로 허가를 받아 교육 프로그램 위주로 편성하다가, 1970년 상업 방송을 선언하고 오락 위주 편성으로 바꾸었다. 언론학자 백미숙은 MBC가 TBC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노골적인 정치적 배려와 특혜 속에서" 전국망을 빠르게 넓혔다고 평가하였다.
라디오 부문에서는 1969년 8월 5일 교육 방송국(호출부호 HLAQ, 88.5MHz)으로 FM 방송 가허가를 받았다. 이어 1970년 3월 3일 상업 방송국(HLKV-FM, 91.9MHz)으로 변경 허가를 받아 1971년 9월 19일 FM 스테레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7월 체신부가 전국을 잇는 마이크로웨이브 회선을 개통하자, MBC는 지역 계열사를 연결해 전국 동시 생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텔레비전 개국을 위한 설비 투자를 차입금에 의존한 탓에 1970년 무렵에는 과중한 타인 자본과 이자 부담이 경영 문제로 떠올랐다. 1971년 6월 취임한 이환의 사장은 자본금을 3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늘리고 직할 지방국 5곳의 영업권을 넘겨 단기 부채를 정리하였다.
프로그램에서는 보도와 드라마가 MBC의 주력이 되었다. 1970년 10월 5일 시작한 《MBC 뉴스데스크》는 아나운서가 원고를 읽는 대신 기자가 현장에서 보도하는 형식을 도입했다. 개국 첫해의 일일극 《개구리 남편》은 기혼 남성과 신입 여사원의 연애를 다뤄 사회적 논란이 되었고 외압으로 중도에 끝났다.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와요》도 1969년에 시작하였다. 1971년 3월 6일에는 경찰 수사극 《수사반장》이 시작되었다. 김수현이 극본을 쓴 일일극 《새엄마》는 1972년 8월 30일부터 1973년 12월 28일까지 411회 방송되어 당시 최장수 일일극이 되었다. 1977년 9월에는 대학생 창작 가요 경연인 《MBC 대학가요제》를 시작했으며, 제1회 대상은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였다. 1979년에는 FM 프로그램 《강변축제》에서 출발한 《MBC 강변가요제》가 시작되었으며, 2001년 제22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정부의 방송 통제는 더 강해졌다. 1973년 2월 16일 개정된 방송법은 방송윤리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각 방송국이 자체 심의실을 두어 방송 전에 사전 심의를 하고 그 결과를 문화공보부에 보고하게 하였다. 광고의 시간과 횟수도 대통령령으로 제한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국영 KBS가 한국방송공사로 바뀌었다. 유신 정부는 정책 시간대에 새마을 운동·근대화·반공을 주제로 한 교양 프로그램 편성을 의무화했고, 불륜과 선정성을 이유로 일일극을 중도 하차시키기도 하였다. 1973년 12월 3일에는 석유 파동에 따른 에너지 절약 조치로 텔레비전 아침 방송이 중단되었으며, 아침 방송은 1981년 5월에야 재개되었다.
1974년 7월 문화방송은 신진 계열이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흡수 통합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11월 1일 문화방송·경향신문·문화방송광고 3사가 통합해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이 출범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으로 합쳐졌다. 백미숙은 이 시기의 신문·방송 겸영이 부실 신문사를 연명시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통합 법인은 1976년 11월 홍콩의 RTV와 뉴스·프로그램 제휴 계약을 맺기도 하였다. 문화방송·경향신문 통합 법인은 1981년 4월 1일 주식회사 문화방송과 사단법인 경향신문사로 분리될 때까지 이어졌다.
언론통폐합과 공영 체제 편입 (1980년~1987년)
10·26 사건 이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언론 검열을 강화했다. 7월 말 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협회·한국통신협회가 이른바 언론 자율 정화 결의를 채택하자, 8월 2일부터 전국 언론사에서 대규모 해직이 단행되었다.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은 결의에 앞서 전 사원에게서 사직서를 받아 7월 15일 부장급 이상 간부를, 7월 19일 기자들의 사표를 수리해 모두 97명을 해직했다. 같은 해 MBC는 1980년 10월 31일 방송된 《제5공화국 정치발전 진단》 등 새 정권을 홍보하는 보도 특집을 잇달아 제작하였다.
이어 한국방송협회와 한국신문협회의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라는 형식을 빌린 언론통폐합 방침이 1980년 11월 12일 관계 당국을 통해 각 언론사에 통보되었다. 동양방송(TBC)과 동아방송(DBS)은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되었고, 텔레비전은 KBS와 MBC 두 방송사만 남게 되었다. MBC는 그때까지 별도 법인으로 운영되던 지방 제휴사 21곳의 주식을 각각 51% 이상 인수해 계열사로 만들었다. 주식 인수는 11월 말에 끝났고, 12월 1일부터 지방사는 문화방송을 정점으로 하는 계열 체제에 편입되었다. 한편 MBC 주식의 70%는 1981년 국가에 헌납된 뒤 KBS에 현물 출자되어, KBS가 MBC의 대주주로서 경영을 좌우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어 국가보위입법회의가 1980년 12월 26일 통과시키고 12월 31일 공포된 언론기본법은 신문과 방송의 겸업을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1974년부터 하나의 법인이었던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은 1981년 4월 1일 주식회사 문화방송과 사단법인 경향신문사로 분리되었다.
방송의 컬러화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KBS가 1980년 12월 1일 컬러 시험 방송을 시작했고, 12월 22일에는 KBS 1·2텔레비전과 MBC가 함께 정규 컬러 방송을 시작하였다. MBC는 11월 24일 컬러 방송 변경 허가를 신청해 12월 17일부터 일부 프로그램을 컬러로 시험 방송하였고, 1981년 1월 1일부터 지방 계열사까지 포함한 전국 컬러 방송을 실시하였다. 1981년 봄 개편은 프로그램의 30%를 바꾼 개국 이래 최대 규모의 개편으로, 컬러 방송에 맞춘 프로그램 대형화를 내세웠다. 같은 해 5월에는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중단되었던 텔레비전 아침 방송이 7년 6개월 만에 재개되었다.
공영 체제 아래에서 MBC 텔레비전의 보도 프로그램 비중은 1977년 12.9%에서 1982년 17.5%, 1986년 25.1%로 커졌다. 언론학자 윤상길은 이를 정보 제공 기능의 강화로 볼 여지도 있지만, 그보다는 공영 체제를 통해 방송을 '공적 기구'로 만든 국가의 방송 이용 의도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며, 뉴스 프로그램의 질적 변화도 땡전 뉴스와 보도지침으로 대표되는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 창출 작업과 분리될 수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땡전 뉴스'는 9시 시보가 울리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방송 뉴스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이 시기 방송에 대한 불신은 1980년대 중반 KBS를 중심으로 한 시청료 거부 운동으로 나타났고, 이 운동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언론 노동조합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1982년 3월 MBC는 여의도에 지하 2층, 지상 10층 규모로 A·B·C·D 네 개의 스튜디오를 갖춘 여의도 스튜디오를 준공하고 제작 기능을 옮겼다. 정동과 여의도로 나뉘어 있던 방송 시설은 1985년 12월 통합 추진반을 꾸려 1986년 4월 여의도로 통합되었다.
프로그램에서는 1980년 10월 21일 시작한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가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전원일기》는 1981년 9월 한국방송협회가 제정한 한국방송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프로 야구 출범에 맞추어 1981년 11월 14일 구단 창단을 발표하고, 12월 21일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MBC 청룡을 창단하였다. 초대 감독은 백인천이었다. 야구단은 1985년 7월 별도 법인인 주식회사 MBC 청룡으로 독립하였고, 1990년 1월 럭키금성 그룹에 매각되어 LG 트윈스가 되었다.
민주화와 방송문화진흥회 설립 (1987년~1991년)
6·29 선언 이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1987년 11월 28일 새 방송법(법률 제3978호)이 제정·공포되었다. 같은 달 MBC는 목포·충주·진주·여수·안동·원주·삼척 등 8개 지방사에 텔레비전 연주소를 열어 전국 20개 계열사가 모두 텔레비전·AM·FM 방송망과 자체 제작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방송 민주화 요구는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7년 12월 9일 문화방송 노동조합이 창립되었고, 1988년 1월부터는 마산·목포·여수·대구·광주 등 지방 계열사에서도 노조가 잇달아 결성되었다. 1988년 6월부터 진행된 첫 단체 교섭에서 노사는 편집권 독립과 편집 책임자 추천 조항 등 공정 방송 부문을 놓고 대립하였다. 노조는 8월 26일 오전 6시부터 한국 방송 사상 첫 파업에 들어갔고, 파업 나흘째인 8월 29일 노사가 공정 방송 조항 등에 합의하면서 30일 업무에 복귀하였다. 그 사이 황선필 사장은 8월 29일 사임했다. 같은 달 KBS 노조와 함께 벌인 이 파업의 결과로, 노사 양측이 함께 운영하는 공정 방송 기구가 마련되었다.
이후 MBC의 소유 구조와 위상이 쟁점이 되었다. 1987년 제정된 방송법에 따라 MBC 주식 70%는 KBS가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1988년 11월 임시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김영수 사장은 노조와 사내 직능 단체들의 반대로 일주일도 안 되어 물러났고, 노조는 권력과 재벌의 간섭을 배제하는 방송 공익 재단 설립을 요구하며 2차 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하였다. 국회는 1988년 12월 17일 MBC 주식을 맡을 공익 법인 설립을 담은 방송문화진흥회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은 12월 26일 법률 제4032호로 공포되었다. 12월 31일 설립된 방송문화진흥회는 창립 이사회에서 MBC 주식 인수를 결정해 지분 70%를 가진 대주주가 되었다. 나머지 30%는 정수장학회가 계속 보유했다.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는 1989년 1월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이던 최창봉을 사장으로 내정했고, 최창봉은 2월 10일 임시 주주총회를 거쳐 방송문화진흥회가 선임한 첫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에는 방송 구조 개편 논의 속에서 MBC의 민영화가 다시 쟁점이 되었다. 1989년 5월 방송위원회의 위촉으로 구성된 방송제도연구위원회는 공영 방송과 상업 방송이 공존하는 체제를 제안하는 보고서를 1990년 4월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 보고서는 MBC 본사와 지방 계열사를 모두 민영화하고, 방송문화진흥회가 정수장학회 지분을 인수한 뒤 주식을 단계적으로 매각하는 방안을 담았다. MBC는 사원 설문 조사와 두 차례의 위상 보고서를 내며 공영 체제 유지를 주장하였다. 공보처가 6월 14일 발표한 방송 구조 개편안은 MBC의 현행 공영 체제를 당분간 유지하고 위상 문제는 따로 검토하기로 하는 한편, 수도권을 대상으로 하는 새 민영 텔레비전을 허용하되 재벌의 참여는 배제하기로 하였다. 이를 반영한 개정 방송법은 7월 11일 국회 문교공보위원회에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야당의 반발 속에 표결로 처리한 뒤 7월 14일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8월 1일 법률 제4263호로 공포되어 9월 2일 시행되었다. 개정법은 민영 방송을 허용하는 대신 개인이나 한 법인이 방송사 주식의 30%를 넘게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민영 서울방송(SBS)이 1991년 3월 20일 라디오 방송을, 12월 9일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면서, 1980년 이후 KBS와 MBC 두 공영 방송사가 텔레비전을 나누어 맡던 체제는 끝나고 공·민영 경쟁 체제가 시작되었다.
다채널·다매체 시대 (1991년~2007년)
1990년대 초 MBC에서는 사장과 노동조합 사이에 공정 방송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1990년 9월 4일 방송 예정이던 《PD수첩》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편이 남북고위급회담을 이유로 결방되었고, 이에 항의한 노조 위원장과 사무국장이 해고되었다. 1992년 노조는 편성·보도·TV 기술 등 3개 국장의 인선에 평사원이 추천권을 행사하는 국장 추천제의 존폐, 임금 인상률, 해고자 복직 등을 두고 단체 교섭이 결렬되자 9월 2일 오전 9시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인사권이 사용자의 고유 권한이라며 추천제 폐지를 주장했고, 노조는 불공정 보도를 막는 최소한의 장치라며 유지를 요구하였다. 《서울신문》 등은 사설에서 노동위원회의 직권 중재 기간에 벌어진 불법 쟁의라고 비판했고, 파업 31일째인 10월 2일 검찰과 경찰이 회사에 공권력을 투입해 농성을 해산하였고, 이튿날 노조 위원장 직무대행 이완기와 대외협력 간부 손석희 등 7명이 노동쟁의조정법 위반과 업무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파업은 50일 만인 10월 21일 노사 합의로 끝났다. 노조는 국장 추천제를 철회하는 대신, 노사 동수로 구성된 공정방송협의회가 보도·제작·TV 기술 등 3개 국장의 문책을 표결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합의하였다. 최창봉 사장은 약 4개월 뒤인 1993년 3월 물러났다.
1996년 3월 13일 주주총회가 강성구 사장의 재선임을 결정하자 노조는 이튿날 오전 5시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는 외부의 영향으로 사장이 선임되었고 강성구 재임 기간의 불공정 보도와 시청률 하락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고, 회사는 사장 선임이 노조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며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 파업이라고 맞섰다. 연임 과정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파업은 24일 동안 이어졌으며, 이후 노조 집행부 징계와 보도국 기자 174명의 집단 사퇴서 제출을 거쳐 강성구는 그해 6월 사퇴하였다.
1990년대 들어 MBC는 다채널 환경에 대비해 제작·기술·광고 부문을 분리하였다. 1991년부터 1992년 사이 MBC 프로덕션, MBC 미디어텍, MBC 미술센터 등의 자회사가 설립되었으며, MBC 프로덕션과 MBC 미디어텍은 2011년 MBC C&I로 합병되었다. 1995년 케이블 텔레비전이 출범한 뒤 MBC는 2001년 자회사 MBC 플러스를 통해 유료 방송 채널 사업에 진출하였다. MBC 플러스는 그해 4월부터 스포츠 채널 MBC 스포츠(현 MBC 스포츠플러스), 드라마 채널 MBC 드라마넷, 게임 채널 겜비씨(뒤의 MBC 게임)를 전국 케이블 방송국을 통해 내보냈다. 2000년에는 인터넷 자회사 아이엠비씨(iMBC)를 설립했고, 아이엠비씨는 2005년 코스닥에 상장되었다.
방송의 디지털 전환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2001년 10월 26일 SBS가 수도권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텔레비전 본방송을 시작했고, MBC는 창사 40주년 기념일인 12월 2일부터 디지털 본방송에 들어갔다. 2005년 3월 MBC는 KBS·SBS 및 신규 사업자 3곳과 함께 지상파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 사업자로 선정되었고, 12월 1일 수도권에서 세계 처음으로 지상파 DMB 방송이 시작되었다. 2004년 6월 경기도 고양시 장항동에 착공한 MBC 드림센터는 2007년 11월 30일 준공되었다. 지상 10층·지하 4층, 연면적 약 78,439㎡ 규모로 제작 스튜디오 5개와 630석 규모의 공개홀을 갖추었으며, 예능국과 드라마국의 주요 부서가 이곳으로 옮겨 갔다.
MBC 드라마의 해외 방영도 늘었다.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방송된 《사랑이 뭐길래》는 1997년 중국 국영 방송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중국어로 방영되어 중국 한류의 계기로 꼽힌다. 당시 시청률은 15%로, 약 1억 5천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에는 상하이에서 20회 압축본이 인기를 얻어 60여 회 전체가 재방송되기도 하였다. 2003년 9월부터 2004년 3월까지 방송된 《대장금》은 마지막 회에서 시청률 55.5%를 기록했고 91개국에 수출되었다. 2006년과 2007년 이 드라마를 방영한 이란에서는 당시 외교통상부 집계로 시청률이 86%에 이르렀다.
2005년 11월 22일 《PD수첩》은 〈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 편을 방송해 황우석 연구팀의 난자 취득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방송 뒤 MBC는 애국적이지 않다는 비난을 받았고 여러 광고주가 광고를 끊었다. 12월 4일 YTN이 제작진의 취재 윤리 위반을 보도하자 MBC는 공식 사과하고 후속 방송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2006년 1월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는 황우석의 2004년 논문까지 조작되었다고 결론지었고,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PD수첩》의 취재가 공식 조사를 촉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였다.
정치적 갈등과 장기 파업 (2008년~2017년)
2008년 4월 29일 《PD수첩》은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편을 방송하였다. 이 방송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로 수만 명이 거리에 나서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같은 해 7월 16일 MBC에 시청자 사과를 명령했고, MBC는 8월 12일 《뉴스데스크》가 끝난 뒤 사과 방송을 내보냈다. 검찰은 2009년 6월 18일 제작진 5명을 정부 관계자 명예 훼손과 쇠고기 수입업자 업무 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였다. 법원은 1심(2010년 1월 20일)과 2심(2010년 12월 2일)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으며, 2심은 일부 내용이 허위라고 보면서도 공익 목적이 강했고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하였다. 2011년 9월 2일 대법원은 제작진 전원의 무죄를 확정하는 한편, 정부가 낸 별도의 정정 보도 소송에서는 주저앉는 소, 미국인 사망자의 사인, 한국인의 유전적 발병 확률에 관한 보도를 허위로 보고 정정 보도를 명하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방송통신위원회는 2009년 8월 7일 방송문화진흥회 제8기 이사 9명을 임명하였다. 엄기영 사장은 방송문화진흥회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MBC 이사진 인사를 강행하자 2010년 2월 8일 사퇴하였고, 2월 26일 청주MBC 사장 김재철이 후임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노조는 김재철이 '낙하산' 논란을 빚은 황희만 전 보도본부장을 부사장에 임명한 데 반발해 4월 5일 총파업에 들어갔고, 39일 만인 5월 13일 파업을 중단하였다.
2012년 1월 30일 노조는 김재철 사장 퇴진과 공정 방송 회복을 요구하며 다시 총파업에 들어갔다. 김재철은 이를 "명분 없는 정치파업이자 불법 파업"이라고 규정하였다. 파업은 MBC 사상 최장인 170일 만인 7월 17일 끝났으며, 그 사이 회사는 조합원 6명을 해고하고 수십 명을 징계하였다. 방송문화진흥회는 2013년 3월 26일 이사회 표결(찬성 5, 반대 4)로 김재철을 해임하였다. 파업 참가자들이 낸 소송에서 서울남부지방법원은 2014년 1월 17일 "공정방송은 노사 양측에 요구되는 의무이자 근로조건"이라며 해고와 정직 처분을 모두 무효로 판결하였다. 업무 방해 혐의로 기소된 노조 집행부에 대해서는 2022년 12월 16일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는데, 공정 방송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 마련이 쟁의 행위의 정당한 목적이 될 수 있다고 대법원이 판단한 첫 사례였다.
이후 김종국(2013년), 안광한(2014년), 김장겸(2017년)이 차례로 사장에 선임되었다. MBC는 2014년 9월 1일 서울 마포구 디지털미디어시티의 상암동 신사옥에서 개막 기념식을 열고 '제2창사'를 선포하였다. 이 시기 MBC의 위상은 낮아졌다. 한국기자협회가 현직 기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2011년까지 신뢰도·영향력 2~3위권이던 MBC는 2013년 신뢰도 0.5%로 떨어졌고, 《시사IN》이 2016년 8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MBC 뉴스데스크》를 가장 신뢰하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꼽은 응답은 3%로, JTBC 《뉴스룸》(17.5%)과 KBS 《뉴스 9》(13.4%)에 크게 뒤졌다. 2017년 6월에는 황금 시간대 평균 시청률에서 처음으로 종합 편성 채널 JTBC에 뒤졌다.
2017년 9월 18일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는 국정원이 2010년 3월 작성한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문건을 공개하며, 이명박 정부의 MBC 장악 시도를 국정원이 기획했다고 발표하였다. 검찰은 2018년 1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재철 전 사장 등을 기소했으나, 법원은 국정원과 공모한 방송 장악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지 않았고, 김재철에 대해서는 노조원 배제와 인사 조치로 노조 탈퇴를 유도한 노동조합법 위반만 유죄로 보아 2021년 3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되었다. 이에 앞서 9월 4일 MBC 노조는 KBS 노조와 함께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들어갔다.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김장겸 사장에 대한 체포 영장 발부를 '언론 장악'으로 규정하며 국회 일정을 거부하였다. 국제기자연맹은 10월 파업 지지를 밝혔고, 국경 없는 기자회도 두 방송사 사장을 신속히 교체해 교착 상태를 끝내라고 촉구하였다. 방송문화진흥회는 11월 13일 이사회에서 김장겸 사장 해임안을 의결했고, 조합원들은 11월 15일 업무에 복귀하였다. 김장겸은 해임 직후 성명에서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이 정말 집요하고 악착스럽다는 점을 뼈저리게 실감합니다"라고 반발하였다.
정상화 이후와 지배구조 개편 (2017년~현재)
2017년 12월 7일 2012년 파업 중 해고되었던 PD 출신 최승호가 사장에 선임되었다. MBC는 이튿날 강지웅·박성제·박성호·이용마·정영하·최승호 등 해직 언론인 6명의 해고를 무효로 하고 전원 복직시켰다. 새 경영진의 인사를 두고 자유한국당은 "파업 참여자와 불참자로 완전히 이분해서" 인사에서 배제하고 징계한다고 비판하였다. 2018년 5월 이른바 '카메라 기자 블랙리스트' 작성을 이유로 해고된 기자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은 2020년 9월 문건 작성이라는 징계 사유만으로는 해고할 정도에 이르지 않는다며 해고 무효 판결을 내렸다. 노사 합의로 만든 과거사 조사 기구인 정상화위원회의 조사를 바탕으로 한 해고와 징계 가운데 일부는 2019년 법원과 노동위원회에서 무효나 부당 판정을 받았다. 2018년 MBC는 여의도 방송센터 부지를 약 6000억 원에 매각하였다.
2020년 2월 역시 해직자 출신인 박성제가 사장에 선임되었다. 2021년 7월 23일 도쿄 올림픽 개회식 중계에서 MBC는 우크라이나 선수단 입장 때 체르노빌 참사 사진을, 이탈리아에는 피자 사진을 붙이고 아이티에는 대통령 암살을 언급한 자막을 내보내는 등 참가국을 부적절하게 묘사해 CNN·《뉴욕 타임스》·《가디언》 등 외신의 비판을 받았다. 박성제는 7월 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방송을 한 데 대해 사과했고, 8월에는 보도 책임자가 물러났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심의소위원회는 9월 9일 이 중계에 법정 제재가 아닌 행정 지도인 권고를 의결하였고, 법정 제재를 주장한 위원 1명은 항의하며 퇴장하였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정부와 MBC의 갈등이 이어졌다. MBC는 2022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뉴욕 방문 중 한 비속어 섞인 발언을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냐"로 처음 보도했고, 대통령실은 해당 발언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었다고 반박하였다. 외교부가 낸 정정 보도 청구 소송에서 서울서부지방법원은 2024년 1월 12일 정정 보도를 명했으나,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은 2025년 8월 18일 외교부에 소를 취하하라는 강제 조정 결정을 내렸고 이 결정은 9월 확정되었다. 이 보도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2024년 매긴 과징금 3000만 원도 2026년 3월 서울행정법원에서 취소되었다. 한편 대통령실은 2022년 11월 "MBC의 외교 관련 왜곡·편파 보도가 반복"되었다며 동남아시아 순방 때 MBC 취재진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기자협회 등 국내 언론 단체와 국제기자연맹은 이를 비판했고, 국경 없는 기자회도 공영 방송에 대한 대통령의 적대적 조치에 우려를 나타냈다. 한편 《시사IN》이 2024년 8월 성인 1,00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MBC는 가장 신뢰하는 언론 매체(25.3%)와 방송 매체(37.4%) 부문 1위에 올랐다.
2023년 2월 안형준이 사장에 임명되었다. 방송문화진흥회의 구성을 둘러싼 법적 다툼도 이어졌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023년 8월 21일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해임했으나, 법원은 1심과 2026년 1월 9일 2심에서 모두 해임을 취소하였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상고를 포기하며 사과하였다. 또 2024년 7월 31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등 2명의 위원이 의결한 방송문화진흥회 신임 이사 6명의 임명은 8월 26일 서울행정법원의 집행 정지 결정으로 효력이 멈췄고, 이 결정은 2025년 3월 13일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본안 소송에서도 서울행정법원은 2025년 8월 28일 방송통신위원회가 위원장에 대한 기피 신청을 부당하게 각하하는 등 재량권을 남용했다며 임명 처분을 취소하였다. 당시 여당이던 국민의힘은 2024년의 집행 정지 결정을 비판하였다.
2025년 8월 21일 국회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고 국회(5명), 시청자위원회, 임직원, 방송·미디어 관련 학회, 변호사 단체(각 2명)가 이사를 추천하도록 하는 방송문화진흥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개정법은 9월 9일 법률 제21046호로 공포·시행되었다. 개정법은 100명 이상의 시민으로 구성된 사장추천위원회가 사장 후보를 추천하고 이사회가 재적 이사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사장을 선임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0월 1일 방송통신위원회가 폐지되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개정법에 따라 새로 구성된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는 2026년 7월 23일 첫 회의를 열었다. 시민 150명으로 구성된 국민추천위원회는 9월 12일 최종 후보 2명을 추천했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는 9월 13일 이성주를 사장으로 내정하였다. 이성주는 9월 14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국민추천위원회를 거친 첫 MBC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소유와 지배구조
주주 구성
MBC는 자본금 10억 원의 주식회사이다. 발행 주식 20만 주 가운데 방송문화진흥회가 14만 주(70%), 재단법인 정수장학회가 6만 주(30%)를 갖고 있다. 방송문화진흥회의 지분은 1980년 언론통폐합 때 국가에 헌납되어 한국방송공사가 관리하던 주식을 1988년 넘겨받은 것이고, 정수장학회의 지분은 1962년 김지태가 내놓은 주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정수장학회 지분의 처분은 여러 차례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2012년 8월 MBC 경영진은 민영화를 포함한 소유 구조 개편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김재철 사장은 "민영화도 검토 대상"이라고 밝혔다. 같은 해 10월 《한겨레》는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MBC 기획홍보본부장 등이 MBC를 주식 시장에 상장하면서 정수장학회 지분 30%를 처분하는 방안을 논의한 대화 내용을 보도했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정치적 의도를 문제 삼으면서 논란이 일었다. 당시 방송문화진흥회 측은 상장과 지분 처분에는 방송문화진흥회와 방송통신위원회의 승인, 정관 개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 지분 처분 논의를 주도한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2013년 2월 25일 사임하였고, 정수장학회는 2025년 말 기준으로도 3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2025년 말 기준 MBC는 16개 지역 문화방송의 최대 주주로, 지분율은 대구·대전·목포·여수문화방송의 51%에서 광주·춘천·울산문화방송과 MBC강원영동의 100%까지 다양하다. 이 밖에 MBC C&I(100%), MBC 아트(89.09%), MBC 플러스(67.91%), 아이엠비씨(58.13%) 등의 자회사를 두고 있으며, 연합뉴스 지분 22.30%도 갖고 있다.
방송문화진흥회와 사장 선임
방송문화진흥회는 방송문화진흥회법에 따라 설립된 법인으로, 자신이 최다 출자자인 방송 사업자, 곧 MBC의 공적 책임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사회는 MBC의 기본 운영 계획, 결산 승인, 경영 평가, 정관 변경 승인, 사장 추천 등을 심의·의결한다. 2014년 개정으로 정당원, 선거로 취임하는 공직자, 대통령 선거 후보의 자문역,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은 그 신분을 잃은 뒤 3년이 지나야 사장으로 추천될 수 있게 되었다. MBC는 해마다 결산상 영업이익의 15%를 방송문화진흥자금으로 내야 하며, 이 자금은 공익적 방송과 시청자 단체 지원 등에 쓰인다.
2025년 개정 전까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9명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임명했으며, 법적 근거 없이 여야가 6대 3으로 나누어 추천하는 관행이 이어졌다. 학계에서는 2010년 이후 사장 선임 때마다 사회적 논란이 되풀이되면서 MBC 지배구조의 취약성이 드러났다고 평가하였다. 2016년 7월 21일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은 공영방송 이사를 13명으로 늘리고 여야 추천 비율을 7대 6으로 바꾸며 사장 임면에 재적 이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요구하는 이른바 '언론장악방지법'을 공동 발의했으나, 이 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를 넘지 못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해 이사 수를 늘리고 추천 주체를 넓힌 이른바 '방송 3법'은 2023년 12월 1일과 2024년 8월 12일 두 차례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 요구(거부권)를 받았다. 당시 국민의힘은 법안에 "공영방송을 언론 관계 단체를 장악하고 있는 이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검은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고, 대통령실은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훼손시키려는 야당의 법안 강행 처리에 대응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밝혔다. 이재명 정부 출범 뒤 2025년 8월 21일 국회를 통과한 개정법에 대해서도 국민의힘은 "방송 장악을 위한 법안"이라며 반대하였다.
개정법에 따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는 13명으로 늘었다. 국회 교섭단체가 의석수 비율에 따라 5명을, MBC 시청자위원회·MBC 임직원·방송 미디어 관련 학회·변호사 단체가 각각 2명을 추천하며,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결격 사유가 없으면 14일 안에 임명해야 한다. 사장 후보는 성별·연령·지역 분포를 대표하는 100명 이상의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가 경영 계획 발표, 면접, 숙의 토론을 거쳐 3명 이하로 추천하고, 이사회는 14일 안에 재적 이사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이 가운데 한 명을 사장으로 추천한다. 기한 안에 의결하지 못하면 결선 투표로 정한다. 이 절차는 2026년 9월 이성주 사장 선임 때 처음 적용되었다.
법적 지위와 정체성 논쟁
MBC는 공적 소유 구조를 가졌지만 상법상 주식회사이며 방송 광고를 주된 재원으로 한다. 방송법에는 공영 방송에 관한 정의가 없고 MBC에 관한 규정도 없어, MBC의 공영 방송 지위는 관행에 기대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때문에 MBC는 공영 방송으로 분류되면서도 공익적 정체성이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이중적 지위는 민영화 논쟁으로 이어졌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1공영 다민영' 정책 기조를 내세웠고,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MBC 소유 구조 정상화'를 언급하면서도 "반드시 민영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당시 엄기영 사장은 한나라당의 민영화 논의에 대해 "현재의 체제가 MBC의 공영성을 지키는 데 더 적절하다"며 반대하였다. 2012년에는 위의 정수장학회 지분 처분 논란과 함께 경영진의 민영화 검토가 쟁점이 되었고, 노조는 이를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방송과 사업
텔레비전
MBC TV는 1969년 8월 8일 개국했고 1980년 12월 22일 컬러 방송을 시작하였다(위 역사 참조). 디지털 방송은 창사 기념일인 2001년 12월 2일 수도권에서 본방송을 시작했으며, 지상파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은 2012년 12월 31일 오전 4시를 기해 종료되었다. 2017년 5월 31일에는 KBS·SBS와 함께 수도권에서 세계 처음으로 지상파 초고화질(UHD) 본방송을 시작하였다.
MBC는 방송 광고를 주된 재원으로 한다. 다만 광고 수익은 줄어드는 추세로, 2025년 별도 기준 매출 7,186억 원 가운데 방송 광고 수익은 2,435억 원으로 전년(2,650억 원)보다 감소했고, 프로그램 판매 등 사업 수익이 4,727억 원으로 더 많았다. 같은 해 영업 손실은 276억 원이었다. 2012년 2월 9일 국회를 통과한 〈방송광고판매대행 등에 관한 법률〉(미디어렙법)은 MBC를 KBS·EBS와 함께 공영 미디어렙인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광고 판매를 대행하는 방송사로 묶었다. 독자 미디어렙 설립을 추진하던 MBC는 이 법을 'MBC 차별법'이라 부르며 반발했으나, 헌법재판소는 2013년 9월 26일 재판관 전원 일치로 이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라디오
MBC 라디오는 표준FM(서울 95.9MHz)과 FM4U(서울 91.9MHz) 두 채널을 운영한다. FM4U는 1971년 9월 19일 개국한 FM 스테레오 방송을 잇는다. 1961년 12월 2일부터 900kHz로 송출하던 중파(AM) 방송(HLKV)은 잦은 난청과 높은 송신소 유지 비용, FM 방송이 있어 AM을 유지할 필요가 적다는 지적 속에 2022년 11월 8일 0시 송출을 멈추었고, 6개월의 운용 휴지 기간을 거쳐 2023년 5월 8일 폐국하였다.
인터넷과 모바일로는 라디오 앱 'mini'를 통해 표준FM·FM4U와 음악 전용 채널을 제공한다.
유료 방송과 디지털 사업
MBC는 유료 방송 채널 사업을 자회사 MBC 플러스(지분 67.91%)를 통해 운영한다. MBC 플러스는 2001년 스포츠·드라마·게임 채널로 출발했으며, 현재 MBC 에브리원, MBC 드라마넷, MBC 스포츠플러스, MBC ON, MBC M 등의 채널을 운영한다. 인터넷 사업은 2000년 설립되어 2005년 코스닥에 상장된 자회사 아이엠비씨(지분 58.13%)가 맡는다.
지상파 3사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푹'(pooq)은 2019년 9월 SK브로드밴드의 '옥수수'와 통합되어 웨이브로 출범했으며, MBC는 운영사 콘텐츠웨이브의 지분 19.83%를 보유하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뉴스 채널 'MBCNEWS'가 2024년 1~8월 월평균 조회 수 6억 4470만 회로 국내 언론사 가운데 1위를 기록했고, 같은 해 8월 구독자는 463만 명이었다.
해외 사업
미주 지역에서는 MBC 아메리카가 북미와 중남미의 한인을 대상으로 24시간 한국어 방송을 내보내며, 미국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스트리밍, 유튜브 등으로 송출한다. 드라마 수출은 1990년대 《사랑이 뭐길래》와 2000년대 《대장금》 등을 거치며 확대되었다(위 역사 참조).
2010년대 이후에는 예능 프로그램의 형식(포맷) 수출이 늘었다. 중국 후난위성텔레비전은 2011년 말 《나는 가수다》의 포맷을 사들여 중국판을 제작했고, 2013년에는 《아빠! 어디가?》의 포맷도 구입하였다. 《복면가왕》을 바탕으로 한 미국 폭스 방송의 《더 마스크드 싱어》는 2019년 1월 2일 첫 방송에서 2011년 이후 비대본 프로그램 첫 회 가운데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복면가왕》은 영국 미디어 컨설팅사 K7 미디어가 꼽은 2019년 '올해의 포맷'이 되었고, 2020년 11월 기준 31개국에서 현지판이 방송되었다. 2025년 기준으로는 50여 개국에 포맷이 판매된 첫 한국 예능 프로그램이 되었다.
지역 계열사
MBC는 16개 지역 문화방송의 최대 주주로서 이들과 전국 방송망을 이룬다. 지역 계열사는 1959년 개국한 부산문화방송을 비롯해 1960~70년대 각지에서 개국한 방송사들로, 1980년 언론통폐합 때 MBC가 21개 지방사의 주식 51%를 인수하면서 계열 체제가 갖추어졌다(위 역사 참조). 이후 경영 효율화를 위해 인접 지역사를 합병하여, 진주MBC와 창원MBC가 2011년 9월 1일 MBC경남으로, 강릉MBC와 삼척MBC가 2015년 1월 1일 MBC강원영동으로, 청주MBC와 충주MBC가 2016년 10월 1일 MBC충북으로 통합되었다.
프로그램과 평가
보도·시사
MBC의 대표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데스크》는 1970년 10월 5일 시작했으며, 아나운서가 원고를 읽던 방식 대신 기자가 직접 보도하는 형식을 도입하였다. 시사 프로그램으로는 1990년 5월 8일 첫 방송한 《PD수첩》이 대표적이다. 《PD수첩》은 2005년 황우석 보도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보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1999년에는 한 교회를 다룬 방송이 도중에 중단되고 2012년에는 11개월 동안 방송이 멈추는 등 굴곡을 겪었다. 1994년 2월 27일에는 시사 프로그램 《시사매거진 2580》이 시작되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방송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민주화 이후 과거사를 되짚은 대표적인 시사 다큐멘터리로 평가된다.
2010년대 초중반 장기 파업과 경영진 교체를 거치면서 시사 프로그램의 위상은 낮아졌다. 1990년대 초 20%에 가까웠던 《시사매거진 2580》의 시청률은 2017년 초 5~6%대로 떨어졌고, 《PD수첩》 제작진도 프로그램의 무게감이 떨어지면서 시청자와 멀어졌다고 진단하였다. 2017년 이후 신뢰도는 회복세를 보였다.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디지털 뉴스 리포트》 한국 조사에서 MBC는 2023년 가장 신뢰받는 개별 뉴스 브랜드로 꼽혔고, 2025년 조사에서도 신뢰도 61%로 방송사 가운데 가장 높았다.
드라마
MBC는 1990년대 이후 '드라마 왕국'으로 불렸다. 이 별칭은 해방 전후사와 한국 전쟁을 다룬 《여명의 눈동자》(1991~1992)가 방송될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 작품은 방송 기간 내내 시청률 50% 이상을 유지하였다.
1970~80년대에는 범죄 수사 드라마의 효시로 꼽히는 《수사반장》(1971~1989)과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 동안 1,088회가 방송되어 한국 드라마 가운데 가장 오래 방송된 《전원일기》가 MBC를 대표하였다. 1990년대에는 《사랑이 뭐길래》(1991~1992)가 한국갤럽 조사에서 평균 시청률 50%를 넘었고 최고 시청률은 미디어서비스코리아 기준 64.9%에 이르렀으며, 1992년 《질투》는 젊은 도시 남녀의 연애를 그려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극 《허준》은 2000년 6월 말 시청률 60%대를 기록하며 종영했고, 《대장금》(2003~2004)과 《내 이름은 김삼순》(2005)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2012년 《해를 품은 달》은 시청률 40%를 넘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MBC 드라마는 침체하였다. 내부 비판에 따르면 파업과 경영진의 제작 간섭, 드라마 PD들의 이탈, 광고 감소에 따른 일일 드라마 적자 등이 겹쳤다. MBC는 2019년 1980년 지상파 3사 가운데 처음 편성했던 월화 드라마를 잠정 중단했고, 언론은 MBC가 '드라마 왕국'의 명성을 잃었다고 평가하였다. 이후 《옷소매 붉은 끝동》(2021~2022)이 최고 시청률 17.4%(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연인》(2023)이 최고 시청률 12.9%를 기록하였다.
예능
MBC 예능은 1969년 시작한 코미디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출발하였다(위 역사 참조). 1988년 11월 27일 시작한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1996년 신호를 지키는 운전자를 찾아 나선 '양심냉장고' 코너로 큰 인기를 끌었다.
2005년 4월 23일 '무모한 도전'으로 시작한 《무한도전》은 2018년 3월 31일까지 13년 동안 563회(전신 포함 615회)가 방송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장르를 대표하며 한국의 '국민 예능'으로 불렸고, 2015년에는 예능 프로그램으로는 16년 만에 한국방송대상 대상을 받았다.
2010년대에는 경연·관찰 형식의 예능이 이어졌다. 2011년 3월 6일 《우리들의 일밤》의 한 코너로 시작한 《나는 가수다》는 기성 가수들의 경연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음악에 순위를 매긴다는 비판도 받았다. 2013년 시작한 《나 혼자 산다》는 혼자 사는 연예인의 일상을 관찰 카메라로 보여 주는 형식으로 10년 넘게 방송되었으며, 남성 중심의 출연진 구성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015년 시작한 《복면가왕》은 해외로 포맷이 수출되었고(위 해외 사업 참조), 2025년 말 방송을 쉬고 2026년 시즌제로 돌아오기로 하였다. 2019년 7월 27일 시작한 《놀면 뭐하니?》는 유재석의 트로트 가수 캐릭터 '유산슬', 혼성 그룹 '싹쓰리' 등을 선보였다.
논란과 비판
MBC의 보도는 집권 세력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정치적 편향 비판을 받아 왔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보수 정부 시기에는 노조와 언론 단체가 경영진의 정권 편향과 불공정 보도를 비판했고(위 역사 참조), 2017년 이후에는 보수 정당이 MBC를 더불어민주당에 기운 방송이라고 비판하였다. 2024년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은 MBC를 "민주당을 위한 언론", "진영 방송"이라고 비판했고,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전체 뉴스를 보고 말씀하셔야" 한다며 객관적으로 보도하려 한다고 반박하였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2023년 《MBC의 흑역사》에서 MBC가 친민주당 방송이 되어 '방송의 진영화'를 이끌었다며 공영 방송의 중립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언론인 김종구는 칼럼에서 이 책이 2008~2016년 보수 정부의 방송 장악을 다루지 않고 보수 언론의 기사에 주로 기댔다고 반박하였다.
윤석열 정부 시기에는 규제 기관의 제재가 MBC에 집중되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MBC에 내린 법정 제재는 2021년 1건, 2022년 4건, 2023년 9건이었으나 2024년에는 1월부터 4월 8일까지만 21건(텔레비전 6건, 라디오 15건)에 이르렀다. 특히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2024년 3월 21일까지 내린 법정 제재 15건 가운데 10건이 MBC에 대한 것이었고, 언론 단체들은 이를 과잉 심의라고 비판하였다. 이후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언론사들이 낸 제재 취소 소송에서 2025년 9월까지 25건 모두 패소했으며, 법무부는 MBC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대한 5건의 항소를 포기하였다. 2026년 5월에는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가 재심을 통해 이 시기 MBC 보도에 내려진 법정 제재를 행정 지도로 낮추기도 하였다.
방송 윤리와 관련해서는 2005년 《PD수첩》의 황우석 보도 과정에서 불거진 취재 윤리 위반과 2021년 도쿄 올림픽 개최식 중계가 대표적인 논란으로 꼽힌다(위 역사 참조).
노동 문제도 제기되었다. MBC 기상캐스터였던 고 오요안나와 관련한 직장 내 괴롭힘 의혹으로 고용노동부가 MBC를 특별 근로 감독한 결과, 2025년 5월 19일 고용노동부는 괴롭힘 행위가 있었다고 밝히면서도 고인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기 어려워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같은 감독에서 보도·시사교양국 프리랜서 35명 가운데 25명이 근로자로 확인되어 고용노동부는 근로 계약 체결을 지시했고, 체불 임금이 적발되어 과태료가 부과되었다.
시설
사옥의 변천
MBC 본사는 서울 인사동, 정동, 여의도를 거쳐 2014년부터 마포구 상암동에 있다. 창사 당시에는 인사동 15번지 동일가구점 건물 4층을 빌려 사무실 겸 연주소로 썼고, 이 임대 사옥은 1969년 정동으로 옮길 때까지 8년간 쓰였다.
텔레비전 방송을 준비하면서 MBC는 1967년 9월 20일 정동 22번지에 새 사옥을 착공했고, 1969년 8월 8일 이 사옥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 1974년 MBC가 경향신문과 통합해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이 되었다가 1981년 4월 1일 두 회사로 다시 분리된 뒤, 옛 정동 사옥은 경향신문 사옥으로 쓰이고 있다. 경향신문 건물 옥상의 송신탑은 방송사 시절의 흔적이다. 2012년 기준으로 이 부지는 정수장학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MBC는 1982년 3월 여의도에 지하 2층, 지상 10층 규모의 여의도 스튜디오를 준공해 제작 기능을 먼저 옮겼고, 정동과 여의도로 나뉘어 있던 방송 시설을 1986년 4월 여의도로 통합하였다. 여의도에는 방송센터와 그 맞은편의 경영센터가 있었으며, 경영센터는 2009년 KTB자산운용의 부동산 펀드에 920억 원에 팔렸다.
MBC는 여의도 방송센터와 일산 드림센터로 나뉜 업무 시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새 사옥을 추진하였다. 언론계에서는 여의도 사옥의 노후와 공간 부족, 방송 장비를 HD로 바꾸어야 하는 시기에 서울특별시가 디지털미디어시티(DMC)를 개발하며 도심보다 훨씬 싼 부지를 내놓은 것이 이전의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MBC는 2007년 3월 26일 서울특별시와 DMC 단지 안의 방송시설용지 34,204㎡에 대한 매매 계약을 맺었다. 2010년 6월 18일 연면적 148,737㎡, 지하 3층~지상 14층 규모로 착공한 신사옥은 2014년 8월 4일 《뉴스데스크》 송출을 시작으로 업무를 옮겼고, 9월 1일 공식 이전하였다. 신사옥에는 모두 5,000억 원이 투입되었다.
상암 사옥은 방송센터, 경영센터, 미디어센터의 세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MBC는 연면적이 149,755㎡로 여의도와 일산 사옥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밝혔다. 지상 9층의 방송센터에는 제작 스튜디오 3개, 뉴스 스튜디오 2개, 매직 스튜디오 1개 등 6개의 스튜디오와 방송 제작 과정 체험 시설이 있고, 14층 건물인 경영센터는 업무 공간 위주로, 같은 14층인 미디어센터는 자회사와 공개홀이 쓰고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암로 267이다.
여의도 방송센터 부지(1만 7,795㎡)는 2011년 10월 홍콩계 헤지펀드 젠투파트너스 컨소시엄과 약 5,000억 원에 매각 양해각서를 맺었으나, 컨소시엄이 자금 확보에 실패하면서 거래가 무산되었고, 매각은 입찰을 시작한 지 7년 만인 2018년에야 이루어졌다. 그해 5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는 신영·GS건설·NH투자증권 등이 참여한 '여의도 MBC부지 복합개발 PFV'에 부지를 약 6,000억 원에 파는 안을 의결하였다. 옛 사옥을 헐어 낸 자리에는 지하 6층~지상 49층 규모의 주거·업무 복합 단지 브라이튼 여의도가 들어서 2023년 10월 입주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제작 시설과 촬영장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의 MBC 드림센터는 2007년 11월 30일 준공된 제작 시설로, 제작 스튜디오 5개와 630석 규모의 공개홀을 갖추고 예능국과 드라마국 주요 부서가 입주하였다. 이 부지는 고양시가 1994년 일산 신도시 토지 이용 계획에서 방송·통신시설 용지로 정해 MBC에 약 620억 원에 분양한 땅으로, 2004년 부지의 절반가량에 오피스텔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가 나면서 MBC는 1만 5,000여 평 가운데 약 9,700평을 제3자에게 팔았다. 지역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헐값 분양과 용도 특혜 논란을 제기하였다. 상암 이전 뒤 드라마와 예능 제작 부서는 본사로 옮겨 갔고, 2019년 기준 드림센터에는 MBC아트, MBC스포츠 등 5개 자회사와 외주 제작사 등이 입주해 있었다. MBC는 향후 활용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26년 기준 드림센터(호수로 596)에는 MBC C&I, MBC 플러스, MBC 아트가 본사를 두고 있다.
양주시 만송동의 MBC 문화동산에 있던 《대장금》 세트장은 2004년 12월 6일 '대장금 테마파크'로 꾸며져 공개되었으며, 《레이디경향》은 이를 국내 최초의 드라마 테마파크로 소개하였다. MBC는 개장 이후 약 129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밝혔으며, 방송용 임시 건물로 지은 세트가 낡아 관람객 안전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2012년 1월 1일 테마파크를 폐장하였다.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에는 MBC의 사극 촬영 단지인 용인 대장금 파크가 있다. MBC는 1987년 12월 이 일대 부지를 사들였고, 2005년 《신돈》 야외 세트를 시작으로 《이산》, 《선덕여왕》, 《동이》 등의 세트를 세웠으며 2008년에는 창고형 스튜디오 두 동을 지었다. 2011년 6월 21일 외국인, 10월 22일 내국인을 대상으로 '용인 MBC 드라미아'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했고, 2015년 8월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2012년 《경기일보》는 이곳을 《신돈》, 《주몽》, 《이산》 등의 야외 세트를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 촬영장으로 소개하였다.
역대 사장
1988년 방송문화진흥회가 설립된 뒤 MBC 사장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가 내정하고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며, 1989년 취임한 최창봉이 방송문화진흥회가 선임한 첫 사장이다. 2025년 방송문화진흥회법 개정 이후에는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의 추천을 거치며(위 소유와 지배구조 참조), 임기는 3년이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사장이 많았다. MBC 노동조합은 황선필·김영수·최창봉·강성구를 정권이 내려보낸 '낙하산 사장'으로 규정하며 이들이 모두 임기 중에 물러났다고 주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도 노성대와 김중배가 임기 중에 사표를 냈고, 김재철은 2013년 방송문화진흥회의 해임 결의 직후 사표를 냈으며, 김장겸은 2017년 총파업 중 해임되었다.
선임일은 1989년부터 2023년까지 방송문화진흥회 연혁의 기록을 따랐으며, 퇴임일이 따로 확인되지 않은 경우에는 후임 사장의 선임일까지를 재임 기간으로 적었다.
기업 상징
심벌과 로고
MBC는 창사 이후 회사의 변화에 맞추어 여러 차례 심벌과 로고를 바꾸었다. 라디오 개국 때 만든 첫 로고는 1969년 6월까지 쓰였고, 이후 텔레비전 개국(1969년 7월), 경향신문과의 통합(1974년 7월), 분리 이후의 컬러 방송 초기(1981년 4월), 여의도 시대(1981년 12월)에 맞추어 로고가 바뀌었다.
1981년 창사 20주년을 계기로 MBC는 회사 이미지 통일화 작업(CIP)을 시작하였다. 경향신문과의 분리로 독자적인 심벌과 로고체가 필요해졌고, 컬러 방송 시대에 대비해 시각 요소를 통일하려는 목적이었다. 홍익대학교 교수 권명광이 제작을 맡은 CIP는 1986년 완성되었고, 그해 9월 6일 디자인 표준 규정집인 《문화방송 CI 매뉴얼》이 발간되었다. 1986년 1월부터 쓰인 심벌은 원과 사각의 타원으로 이루어졌으며, 45도로 기운 폐곡선 타원은 발전과 성장 의지를, 자이로스코프처럼 보이는 가운데의 타원은 방송 본연의 공익성을 상징한다고 설명되었다.
2005년 1월 3일 MBC는 'NEW MBC' 선포식을 열고 별도의 심벌 없이 영문자 'MBC'를 시각화한 워드마크를 도입하였다. B자 안에 넣은 빨간 정사각형은 모든 미디어를 상징한다고 설명되었으나, 도입 직후 포털 사이트 미디어다음의 의견 조사에서는 이전 로고가 낫다는 응답이 70%를 넘었다. 2012년 1월부터는 지금의 로고를 쓰고 있다. 사선 막대 모양의 키 그래픽 안에서 'MBC 무브먼트'가 360도 회전하는 그래픽 모티프를 함께 쓰며, 대표 색상은 MBC 퍼플(팬톤 2665C)이다. 캐릭터로는 엠빅(Mbic)과 휴, 캡, 다크 엠빅으로 이루어진 'Mbic Friends'를 두고 있다.
슬로건과 브랜드송
'만나면 좋은 친구'는 1990년대부터 MBC의 ID송(로고송)으로 쓰인 문구이다. 이 로고송은 2011년 박명수·김연우·성시경 등이 다시 불렀고, MBC는 창사 60주년인 2021년 'GO! MBC'를 슬로건으로 쓴 데 이어 2022년 '만나면 좋은 친구'를 다시 공식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 밖에 2018년 윤종신의 〈두근두근 MBC〉, 2021년 창사 60주년을 맞은 이날치의 〈좋구나 MBC〉, 2022년 12월부터 쓰인 웬디의 〈MEET ME, MBC〉 등의 브랜드송을 만들었다.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방송
한국교육방송공사
문화방송의 아나운서 목록
MBC 연기대상
MBC 방송연예대상
MBC 가요대제전
MBC 창작동요제
더 읽을거리
손병우; 최이숙; 이성민; 조항제; 박건식; 주창윤; 박근서; 임종수; 강보라 (2021년 11월 25일). 《MBC 60년, 영광과 도전》. 방송문화진흥총서 219. 한울엠플러스. ISBN 978-89-460-7340-1.
외부 링크
문화방송 - 공식 웹사이트
MBC와 함께 – 회사 소개·연혁·CI 누리집
방송문화진흥회 – 대주주 공식 누리집


